국가보훈부는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오기호·이기·홍필주 선생을 **‘2026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이에 맞서 전국 곳곳에서 의병 봉기와 다양한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됐다. 초기에는 일본 정부와 정계 인사들을 상대로 장서를 보내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으나,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투쟁 방식은 점차 의열 투쟁으로 옮겨갔다.
오기호 선생은 외교적 대응의 한계를 인식한 뒤 비밀결사 자신회(自新會) 조직을 주도하며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했다. 폭탄과 저격을 활용한 거사 준비 과정에서 자금 조달과 무기 구입을 직접 맡았고, 이후에도 계몽운동과 실업교육, 대종교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기 선생은 대일 외교활동 이후 자신회에 참여해 **‘자신회 취지서’**를 작성, 을사오적 처단이 개인적 복수가 아닌 민족 해방을 위한 정치적 행위임을 분명히 했다. 또 재판 과정에서 **‘자현장(自現狀)’**을 통해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하며 독립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다졌다.
홍필주 선생은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을 비롯해 일본의 침략 정책에 맞선 저항 활동을 펼쳤다. 이기 선생과 함께 도쿄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며 을사늑약 저지를 시도했고, 이후 을사오적 처단 계획에도 참여했다. 더불어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을 조직해 계몽·교육운동에 힘썼다.
비록 을사오적 처단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이는 외교 투쟁에서 의열 투쟁, 나아가 정신운동으로 독립운동의 노선이 확장되는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오기호·이기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홍필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외교가 좌절된 자리에서 행동으로 역사를 바꾸려 했던 이들의 선택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실패로 끝난 계획이었지만, 그 결단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넓히는 씨앗이 됐다는 점에서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비즈데일리 이성화 기자]













